최승로의 5조 정적평
최근 시행된 경찰 시험에서
한국사 문제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최승로의 5조 정적평이 화제입니다.
경찰시험에서는 5조 정적평의
사료로서의 가치, 뜻하는 바 보다는
단순 암기를 요하는 문제가 나왔지만
원래 이 사료는 속을 드려다보면
역대 왕들의 업적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고 설명하는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료입니다.
사료가 가진 의미를 파악하며
시간날 때 틈틈이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드라마 '보보경심려'를 보셨나요?
픽션이 많이 섞이긴 했어도
낯선 고려초기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는데요,
보다 쉽게 접근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사료에서 설명하는 왕들의
자료 사진은 보보경심려 기준으로
넣어봤으니 그냥 참고해주세요)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여신 이래로
신이 알게 된 것들은
모두 신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앞선 5대 조정의 정치와 교화에 대해서
잘되고 잘못된 행적들을 기록하고,
거울로 삼거나 경계할 만한 것들을
삼가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태조
통일을 이룬 이후로 8년 동안 정치에 힘써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도의로써 이웃나라와 사귀었습니다.
편안할 때에도 안일하지 않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는 공경을 생각했으며,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였습니다.
궁실을 낮추어 비바람만을 겨우 가리고자 하였으며,
거친 옷을 입어 다만 추위와 더위만을 막을 뿐이었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겼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로써 사양하는 마음이
타고난 품성에서부터 우러나왔습니다.
혜종
어떤 사람이 정종 형제를 참소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혜종께서는 그 말을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물어보지도 않고,
은혜로 대우함을 더욱 두텁게 하여
처음과 같이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습니다.
얼마 뒤 덕정을 닦으셨으나
과도하게 목숨을 아껴서
전우좌우로 항상 무장한 병사들이
서로 따르게 하였으니,
대개 남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군주로서의 채통을 크게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정종
정종께서는 잠저에 계실 때에
일찍부터 명성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으시자
왕규등이 몰래 도모하는 것(왕규의 난 / 945 혜종2)이 있어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아시고
은밀히 서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세워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에
호위 병사들이 대거 이르렀습니다.
도참설을 믿어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또 그 타고난 품성이 강직했던 탓에
고집을 꺾지 않고 가혹하게 징발하여
역사를 일으켜서 인부들을 고되게 하였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재난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리 호응하였습니다.
미처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채
왕위에서 떠나게 되었으니,
진실로 애통하다고 할 만 합니다.
광종
즉위하신 해로부터 8년 동안
정치와 교화가 맑고 태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남발되지 않았습니다.
쌍기가 투탁하여 온 이후로는
문사를 존숭하고 중히 여겨 은혜를 베풀고
예우함이 과도하게 후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재주가 없는 자들이
함부로 관직에 나아가고 차례를 지키지 않고
갑자기 승진하여 해를 채우기도 전에
곧 재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중국의 풍속을 중시하였으나,
중국의 좋은 법식은 취하지 않았으며,
비록 중국의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한 것입니다.
불사를 심하게 믿어서
일상적으로 행한 재의 설행이 이미 많았고,
특별히 발원하여 향불을 피우고
기원한 것이 적지 않았으며,
또 연희와 놀이에 드나들면서는
극도로 사치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죄 없는 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만약 광종이 항상 공손하고 검소하여
아껴 쓸 것을 생각하면서
처음과 같이 정치에 힘썼더라면
어찌 그 복록과 수명이 영원하지 못하고
겨우 50년을 누리는 데에 그쳤을 뿐이었겠습니까.
더욱이 경신년(960)부터 을해년(975)에 이르는
16년 사이에는 간사하고 흉악한 이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와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
군자는 받아들여질 곳이 없었고
소인배들이 그 뜻을 이루어,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노비가 그 주인을 비난 (노비안검법 비판)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마음을 달리하고
여러 신하가 흩어져서,
옛 신하와 노장들이
서로 연이어 죽임을 당하고 (호족 세력 숙청)
골육과 친인척 또한 모두 제거되었으며,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에 대해서도
또한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경종께서는 동궁에 계실 때에
항상 스스로 편안하지를 못하였다가
다행히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경종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참소가 일어났는데,
형장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죄가 없는 이들이었으며,
역신의 훈신과 노장들이
모두 죽임을 면하지 못하여 사라져갔습니다.
경종께서는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에는
옛 조정의 신하로서 남아있는 자들이
40여 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해에도 또한 해를 입은 자들이 많았지만,
모두 후진들과 남을 참소한 무리들이었으므로
안타까워 할만한 일이 못됩니다.
다만 천안낭군과 진주낭군은
본래 황실의 자손으로서
광종도 오히려 스스로 관용을 베풀어서
끝내 법 앞에 세우지를 않았으며,
경종 때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울타리가 될 만 하였는데도
도리어 권신들에 의해서 해를 입었으니
어찌 애통하고 안타깝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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